728x90
반응형
화폐전쟁 1편 달러의 종말
쑹훙빙 지음
제 1장 - 로스차일드 가문: 대도무형의 세계적 부호
유대인 로스차일드 일가이며 그들의 재산은 빌 게이츠의 1,000배 이상 된다는 것. 앤드루 잭슨부터 에이브러햄 링컨, 존 F. 케네디 등의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화폐발행권을 둘러싼 국제금융재벌의 음모 때문에 살해당했다는 것.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1929년 대공황,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아시아 금융위기, 심지어 반년 새 반 토막이 난 상하이 증시까지..., 이 모든 것이 로스차일드가로 대표되는 금융재벌의 득세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화폐전쟁'의 핵심 내용이다.
'대도무형', 진정한 은자는 산속으로 숨지 않고 사람들 곁에 있든, 로스차일드 가문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은행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100명 중 99명은 미국 씨티은행은 알아도 로스차일드은행은 모른다고 말한다.
Chapter 01 워털루전투와 로스차일드가
Chapter 02 로스차일드 가문이 등장한 시대 배경
로스차일드는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불길처럼 퍼지고 금융업이 전에 없이 번성하던 시대에 성장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금융의 실체와 개념이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갔다. 새로운 금전의 실체와 개념은 1694년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면서 모험 정신이 충만한 은행가들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은행의 핵심은 국왕과 왕실 가족의 개인 채무를 국가의 영구적 채무로 변환하는 것이었다. 전 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잉글랜드은행이 채무에 기반을 둔 국가화폐를 발행했다. 이렇게 해서 국왕은 전쟁에 필요한 돈을 확보했으며, 정부도 뜻대로 정책을 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은행가들은 그동안 꿈꿔오던 거액의 대출을 해주고 짭짤한 이자 수입을 챙기게 되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었다. 다만 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했다는 점이 옥에 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제도는 국가화폐의 발행과 영구적 국채를 묶어놓는 구조였다. 그래서 화폐를 신규 발행하면 국채가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국채를 상환하면 국가의 화폐를 폐기하는 셈이 되므로 시중에 유통할 화폐가 없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영원히 채무를 상환할 수 없다. 이자를 갚고 경제도 발전시켜야 하므로 화폐 수요는 필연적으로 늘어날테고, 그 돈은 다시 은행에서 빌려와야 했기 때문에 국채는 계속해서 불어날 수밖에 없다.
Chapter 03 로스차일드의 첫 번째 뭉칫돈
윌리엄 왕자의 측근이 된 메이어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얼마 후 프랑스 혁명(1789-1799)이 일어났는데, 그 영향은 점차 주변 군주제 국가에까지 미쳤다. 이에 윌리엄 왕자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혁명이 독일에도 영향을 미쳐 폭도에게 재산을 약탈당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왕자의 우려와는 다르게 메이어는 프랑스혁명을 반겼다. 사회가 불안해질수록 그의 금화 유통량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창끝이 신성로마제국을 겨누자, 독일과 영국의 무역 중단으로 수입품 가격이 폭등했다. 그러자 메이어는 영국에서 물건을 들여다 독일에 판매함으로써 거액의 차익을 챙겼다.
1803년에는 메이어와 윌리엄 왕자의 관계를 더 돈독게 하는 계기가 있었다. 그 내용인즉 윌리엄 왕자의 사촌형 중 덴마크 국왕이 있었는데, 그가 윌리엄 왕자에게 돈을 빌리고자 했다. 윌리엄 왕자는 자신의 재산이 노출될까 봐 빌려주기를 꺼렸다. 메이어가 이 사실을 알고 왕자에게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즉 왕자가 돈을 내놓되 메이어가 나서서 로스차일드의 명의로 덴마크 국왕에게 대출을 해주고, 이자는 메이어가 공제하는 방식이었다. 왕자는 그럴듯한 아이디어라며 좋아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부를 드러내지 않고도 돈을 빌려줄 수 있는 데다 원금을 떼일 걱정도 없었다. 메이어로서는 꿈에도 그리던 일이었다. 국왕을 상대로 한 대출은 안정적 수익뿐 아니라 명성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대출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이어 덴마크 왕실에서 신청한 여섯 건의 대출이 메이어를 통해 성사되었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삽시간에 유명해졌다. 특히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윌리엄 왕자에게 거액을 받자마자 그는 행동을 개시했다. 그의 다섯 아들은 마치 다섯 발의 화살처럼 유럽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중요한 다섯 개 지역에 파견되었다. 큰아들 암셀은 프랑크푸르트 본점을 지키고, 둘째 살로몬은 빈으로 보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도록 했다. 셋째 아들 네이선은 영국으로 보내 대국을 주도하도록 했으며, 넷째 카를은 나폴리로 보내 근거지를 세우게 했다. 형제들은 늘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이들 사이의 연락을 담당한 다섯째 제임스는 파리의 업무를 관장했다.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금융제국은 이렇게 막을 열었다.
Chapter 04 네이선, 시티오브런던을 장악하다
시티오브런던
18세기 이래 줄곧 영국 및 세계의 금융 중심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곳은 독립적인 사법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바티칸공화국과 유사한 '국가 속의 국가'라 할 수 있다. 비좁은 이 지역에는 잉글랜드은행 본점을 포함한 세계의 주요 금융기관들이 운집해 있으며, 현재 영국 GDP의 6분의 1을 창출한다. 이러한 시티오브런던을 주도하는 사람은 영국을 주도하는 셈이다.
네이선은 워털루 전투를 통해 시티오브런던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영국의 경제 명맥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이때부터 화폐 발행과 황금 가격을 포함한 중요한 결정권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Chapter 05 제임스, 프랑스를 정복하다
영국에서의 악몽을 되새긴 사람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채권시장을 조작하지 않았나 의혹을 갖기 시작했고, 의혹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1818년 10월부터 로스차일드 가문은 탄탄한 재력을 기반으로 유럽의 각 도시에서 프랑스 국채를 은밀히 사들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채는 조금씩 가격이 올랐다. 그 후 11월 5일부터 그들은 유럽 각지에서 프랑스 국채를 대량 투매하여 시장을 공황에 빠뜨렸다.
과연 제임스 형제가 손을 쓰자마자 채권의 붕괴 국면이 진정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전국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프랑스군이 전쟁에 패한 이후 그들은 경제위기에서 프랑스를 구해준 영웅이 된 것이다.
Chapter 06 살로몬, 오스트리아의 제위를 노리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눈에는 전쟁도 평화도 없으며 구호와 선언도, 희생과 영예도 없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미혹하는 것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딛고 일어설 디딤돌만 있을 뿐이다. 윌리엄 왕자가 그중 하나요, 또 하나의 디딤돌은 메테르니히다.
빈은 유럽 정치의 중심이다. 거의 모든 유럽 왕실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와 복잡한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신성로마제국의 왕실을 위해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북부,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체코, 슬로바키아와 프랑스 동부 지역을 400여년이나 통치한 유럽 정통의 왕실 혈통이었다.
메테르니히와 겐츠의 적극적인 추천에다 로스차일드와 윌리엄 왕자의 관계, 그리고 덴마크 왕실과의 긴밀한 비즈니스 관계에 힘입어 살로몬은 드디어 합스부르크의 높은 문턱을 넘었다. 왕실은 고정적으로 살로몬의 은행에서 융자를 받았으며, 살로몬은 빠르게 그들과 한울타리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822년에 메테르니히와 겐츠, 그리고 살로몬, 제임스, 카를의 3형제는 베로나회의에 참석했다. 회의가 끝난 후 로스차일드 은행은 수익성이 높은 중유롭 철도 프로젝트의 자금 융자 은행으로 지정되었고, 이로써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로스차일드의 영향력을 새삼 실감했다.
1843년에 살로몬은 비트코비체 연합 광업회사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련회사를 인수했다. 이들 두 회사는 당시 세계 10대 중공업기업으로 손꼽히는 큰 기업이었다.
1848년, 살로몬은 오스트리아의 금융과 경제를 주무르는 거물로 성장했다.
Chapter 07 로스타일드 휘하의 독일과 이탈리아
나폴레옹이 철수한 후부터 독일은 그동안 흩어져 있던 300여 개의 작은 봉건국가를 합병해 30여 개의 큰 봉건국가로 구성된 도이칠란트연방으로 거듭났다. 프랑크푸르트에 남아 있던 로스차일드가의 큰아들 암셀은 도이치연방의 초대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822년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남작에 봉해졌다. 프랑크푸르트의 로스차일드은행은 독일 금융의 중심이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슬하에 자식이 없던 암셀은 후계자를 키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중 암셀의 전폭적 신임을 받는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훗날 현대사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긴 독일의 철혈 수상 비스마르크다.
1818년 다섯째 제임스가 국채를 둘러싼 경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한 후로, 넷째 카를은 가문을 대표하고 있던 셋째 형 네이선으로부터 이탈리아 나폴리로 가서 은행을 세우라는 명을 받는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형제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훌륭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메테르니히에게 이탈리아의 혁명을 진압할 군대를 보낼 자금을 대주는가 하면, 탁월한 정치 수완으로 이탈리아 정부에 손을 써서 점령군의 경비를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친구 메디치가 나폴리 재정장관 자리를 되찾도록 돕기도 했다. 이탈리아 왕실의 재정적 기둥이 되어가던 카를의 영향력은 이탈리아반도 전역에 미쳤다.
Chapter 08 로스차일드 금융제국
가족의 엄격한 통제, 은밀한 물밑 작업, 기계처럼 정확한 협조, 빠른 시장 정보 수집 능력, 냉철한 이성, 금권에 대한 끝없는 욕망, 그리고 이 모든 것에 기반을 둔 금전과 재산에 대한 깊은 통찰과 천재적인 예지 능력 등이 로스차일드가가 200년 동안 전세계의 금융 및 정치와 전쟁의 냉혹한 소용돌이 속에서 활약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방대한 금융제국을 세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국제 금융 청산 시스템을 처음으로 설립해 전 세계 황금시장을 통제하는 데 이용했다. 그들은 가족 은행 체계 중 처음으로 실물 황금을 운반할 필요가 없는 계정 청산 시스템을 도입했다.
은행가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은 큰 호재다. 평화 시기에는 감가상각이 느리게 진행되던 각종 고가의 시설과 물품이 전쟁 때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기 마련이다. 전쟁의 당사자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싸움에서 이기려고 하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긴 쪽 정부든 진 쪽 정부든 은행 채무라는 함정에 빠져들고 만다. 잉글랜드은행의 설립 때부터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121년 동안(1694-1815) 영국은 56년을 전쟁 가운데 보냈으며, 나머지 시간의 절반은 전쟁 준비에 할애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유럽의 주요 공업국가의 화폐 발행 권리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중에 떨어짐으로써 신성한 군주의 권리가 '신성한 금권'으로 대체되었다.
나의 생각
워털루전투와 근대 유럽의 역사적 배경을 잘 알지 못해서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힘이 들었다.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다섯 형제가 유럽 주요 지역에 은행을 세우고 각 나라 금융의 중심이 되기까지 형제들이 뛰어난 식견과 외교 능력을 바탕으로 한 치의 흐트러짐없이 형제들과 손발이 잘 맞았다는 게 인상 깊었다.
은행가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호재라는 대목도 놀라웠다. 무시무시한 전쟁도 은행가들에겐 그저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 보인다는 게 씁쓸했다.
728x90
반응형
'관심분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캐나다 여행하기 좋은 계절 (0) | 2023.05.09 |
---|---|
미술 회화의 역사 1 (0) | 2023.03.14 |
최애 캐릭터 새대갈: 유튜브 짤툰 짐승친구들 (0) | 2022.09.13 |
요즘 듣는 노래: 온앤오프(ONF)와 오프온오프(OFFONOFF) (0) | 2022.09.13 |
취업 면접 질문 리스트 준비 사항(+도움되는 유튜브 채널들) (0) | 2022.07.21 |
댓글